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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산업은 극도로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희귀 금속은 칩 제조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소재다. 가령, 갈륨, 게르마늄, 텅스텐, 네오디뮴 등은 전력 반도체, 고주파 기기, 전자빔 장비, 리소그래피 장비에 필수적이다. 이들 소재는 회로 설계와 전자기 성능을 좌우하는 산업의 비타민으로 불린다.
희귀 금속, 반도체 산업의 숨겨진 심장부
이 희귀 금속 대부분의 주요 공급국이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세계 갈륨 생산의 90% 이상, 게르마늄의 60% 이상을 공급하고 있으며, 희토류 가공 기술과 처리 시설에서도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중국이 희귀 금속의 수출을 제한하거나 금지한다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전체가 충격을 받게 된다.
2023년 이후, 중국은 갈륨과 게르마늄에 대한 수출 통제 조치를 강화했고, 2024년 들어 일부 항목의 수출을 사실상 봉쇄했다. 이는 미국의 반도체 제재에 대한 반격이자, 기술 패권 전쟁에서 자원을 무기화하려는 전략이다. 하지만 이 조치는 단지 미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유럽 등 반도체 공급망 전반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반도체 공급망의 병목 현상과 재편 움직임
희귀 금속 수출 규제는 단순히 소재 확보의 어려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웨이퍼 제조, 박막 증착, 식각, 리소그래피 등 공정 단계에서 사용되는 특수 소재들이 부족해지면, 고급 반도체는 물론 차량용·산업용 칩 생산에도 지연이 발생한다. 특히 전력 반도체나 통신용 RF칩처럼 특정 금속에 의존도가 높은 제품군은 직격탄을 맞는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의 공급망 다변화 노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희귀 금속의 자원 재활용 기술과 대체 소재 개발에 투자하고 있으며, 미국은 내셔널 디펜스 스트래티지(NDS)에 따라 희귀 금속을 전략 비축물자로 지정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3년부터 핵심 원자재 법을 추진하며 자원의 국산화와 해외 광산 투자 확대를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전략들이 단기간 내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희귀 금속은 매장량뿐 아니라 정제·가공 기술이 고도화되어야 하며, 이 과정은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일부 금속은 지정학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국가에 집중되어 있어 공급망 불안은 단기적 현상을 넘어 중장기 리스크로 확장되고 있다.
기술 패권 경쟁 속 희귀 금속의 지정학적 전선화
중국의 수출 규제는 단순한 경제 조치가 아니라, 지정학적 무기다. 미국이 반도체 장비와 설계 소프트웨어에 대한 수출을 제한하며 기술 우위를 지키려는 전략을 구사하자, 중국은 이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 자원을 선택했다. 갈륨과 게르마늄을 비롯한 희귀 금속은 전략 물자이자 협상 카드로 전락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기술 공급망의 지정학화 현상을 가속화시킨다. 이제 반도체는 단순한 경제재가 아니라 국가 안보와 직결된 핵심 전략산업이며, 희귀 금속은 그 산업을 지탱하는 지하의 혈류와도 같다. 공급의 차단은 단순한 생산 지연이 아니라, 전체 기술 생태계의 속도를 늦추고 의존도를 재점검하게 만드는 신호다.
앞으로 미국과 동맹국들은 중국 외 지역에서의 희귀 금속 생산 역량을 확대하고, 전략적 재고 확보 및 리사이클링 기술에 투자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이 시장에서 압도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으며, 제재와 반제재의 악순환 속에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더 복잡하고 불확실한 구조 속으로 진입하고 있다.